프로젝트R림: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어요

프로젝트 R림: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어요.

“사랑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말, ‘고맙다’는 말…?”

R림?

HIV/AIDS에 대한 올바르고 정확한 정보를, HIV/AIDS감염인의 존재와 그 인권을, 그리고 삶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낙인에 맞서며 에이즈혐오를 격파하는 구술프로젝트. 세상은 그냥, 쉽게, 하루아침 사이에 바뀌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지요. HIV감염인인 우리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엄연히 존재하며, 이 세상에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릴 것입니다.

주인공: 민혁 & 진호

글 작성 및 편집: 소주

민혁와 진호는 둘 다 술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

독특하게도, 서로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민혁과 진호 커플을 만났다. ‘고맙다’는 그 좋은 말을 왜 금지어로 정했을까?

“해서는 안되는 말, ‘고맙다’는 말”

민혁은 진지하게 얘기를 꺼냈다. ‘사실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거든요. 사귀지 못할 것 같고…’ 민혁은 사귀기 전에 자신이 HIV감염인이기 때문에 두렵고, 미안하고, 고마웠던 마음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나랑 왜 사귀지? 이런 거 있잖아요. 고맙다는 마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이 깊어졌다. 민혁은 진호에게 정말 고마워해야하는 걸까? HIV감염인이 비감염인을 만날 때,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걸까? 당연한 것일까? 의문을 품기 시작한 나의 복잡한 생각과 속상함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민혁은 곧이어 이렇게 말하며 정리해주었다. ‘하지만 그 (고맙다는)말을 하지 않기로 했어요. 사실 마음은 정말 많이 고마운 데,, 우리는 평등한 관계니까요.’

“똑같은 사람인데”

민혁의 얘기를 찬찬히 들으며 공감했다. 조금은 복잡하고 많이 속상했던 나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민혁의 연인 진호는 민혁의 말에 가벼운 깃털을 얹듯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똑같은 사람인거죠.’ 진호는 민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맞아, 똑같은 사람인데, 왜 고마워해야해?’

HIV감염여부 때문에 (심지어 연인관계에서도) 생길 수 있는 기울어진 고마움, 혹은 미안한 마음, 어쩌면 두려운 감정까지도 민혁과 진호 커플은 없애기로 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고마워해야 하는 관계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민혁과 진호는 강조했다. 당연한 말인데, 난 왜 그 순간 이 커플을 존경스러워 했을까. 나는 생각을 잠시 접고 다시 찬찬히 이 커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알려지는 건 무서워요”

민혁은 HIV감염사실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평상시에도 아주 현실적인 사고를 하는 편이라는 민혁이 말했다. ‘죽는 병도 아니고.. 무서워 할 필요가 없었어요. 저는 기본적인 정보들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 민혁도 두려운 것은 있다고 했다. ‘내가 HIV감염인이라는 사실은 두렵지 않지만, (HIV감염사실이) 알려지는 건 무서워요. 공포감이 들어요. (무지한 사람들의) 시선은 두려운 거죠.’ HIV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본인의 감염사실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었지만, 에이즈혐오를 일삼거나 무지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인의 HIV감염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두렵다고 얘기했다. ‘일상생활을 함께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 모르는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볼까봐, 혹시 밥을 같이 먹는 것도 싫어하고 그럴까봐….’

“나도 사실은 잘 모르고 있었어.”

옆에서 듣고 있던 진호가 얘기했다. ‘나도 사실 예전에는 그런 (HIV/AIDS에 관한) 정보들을 전혀 모르고 살아왔었는데….’ 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사회의 에이즈혐오가 너무 심하니까.. 사실 나도 그 혐오에서 자유롭지 못했어.’ 지금은 HIV감염여부와 상관없이 민혁을 사랑하는 진호이지만, 예전에는 에이즈를 혐오하는 관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어떻게 과거와 달라질 수 있었는지, 진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람이 일상에 녹아든다는 것”

진호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사랑의 힘으로, 낭만적으로 극복했다?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진호는 HIV감염인인 민혁이 하루아침에 자신의 삶으로 녹아든 것은 아니라고 얘기했다. 진호는 본인이 그렇게 짧은 시간 사이에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대단한 뭔가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같이 지냈을 뿐이에요. 가끔 약을 먹었냐고 물어보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진호는 그냥 같이 지내면서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HIV감염인이 비감염인과 다르지 않게 이 세상에 더불어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호는 그렇게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변화가 가능하다고 얘기했다. ‘우리는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해요. 너도나도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요.’

“너무 고마웠어요.”

민혁이 HIV감염사실을 얘기했을 때 감정이 어땠는지 진호에게 물었다. 진호는 이렇게 답했다. ‘너무너무 고마웠어요. 나를 이렇게 믿고 있구나. 신뢰해주는 구나.’ 듣고 있던 민혁이 웃으며 덧붙였다. ‘내가 말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말해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민혁은 진호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싱글벙글했다.

나는 다시, 진호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HIV감염여부가 민혁을 사랑하는 데 걸림돌이 된 적은 없나요?’

“HIV감염여부는 결국,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사실 사귀는 것에 대해서는 망설였었어요. 가슴이, 마음이.. 생각처럼 되지 않았어요.’ 진호도 처음에는 망설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민혁이 얼마나 마음이 넓고 멋진 사람인 지 느껴졌을 때, HIV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언젠가, (민혁의 HIV감염사실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HIV/AIDS를 언급하며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했는데, 민혁은 그 사람을 오히려 안아주었어요.’ 진호는 그 때, 민혁의 넓은 마음을 본 순간, HIV로 인해 고민하고 망설였던 것들이 단칼에 사라졌다고 얘기했다. ‘민혁이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은, 가령 HIV감염인이라는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거죠.’ 진호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던 말을 계속 이어갔다. ‘너무 감동받아서,, 이 사람이라면 정말 믿어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믿고 만나도 되겠다고.’

“사람을 특정 짓는다?”

진호는 민혁을 만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람은 특정 지을 수 없어요. 그게 민혁이를 만나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거예요.’ 특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물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어떤 집단에 대해서 편견으로 낙인을 가하고, 딱지를 부과하고, 사실 그런 것은 불가능해요. 그런 짓은 불가능해야 해요. 사람은 특정 지을 수 없어요.’ 진호는 그렇게 말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사랑표현을 했다. ‘ 저는 민혁이가 민혁이어서 좋은 거예요. HIV감염여부와 상관없이, 민혁이니까, 민혁이라는 사람이 좋은 거예요.’

“같이 잘 살자”

민혁이 얘기를 할 때면 진호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고, 진호가 얘기를 할 때에도 민혁이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민혁과 진호는 아옹다옹 옥신각신 다투는 듯이 서로에게 사랑을 말했다. 나는 사랑스러운 두 사람의 분위기가 깨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민혁에게 인터뷰의 마무리를 위한 질문을 했다. 비감염인과의 만남을 어려워하는 감염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솔직한 마음으로는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함부로 감히 그렇게 얘기할 수 없는 것 같아요. 힘들지 않게.. 그런 (차별과 낙인이 없는) 사회가 먼저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로 딱히 할 수 있는 말은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잘 버텼으면, 잘 살아냈으면, 꾸준히 잘 버티고 살아냈으면 좋겠어요. 너무 열심히 안살아도 괜찮을 것 같고. 그냥 같이 잘 살자는 말을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