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발표] 재난피해자, 취약계층에 대한 혐오표현의 문제 (2022 한국인권보고대회)

12월 5일 개최된 2022 한국인권보고대회의 <집중조명1 사회적 참사 국면에서의 시민과 재난피해자의 권리>에 소주 활동가가 혐오표현에 대한 토론으로 함께 했습니다.


토론3 재난피해자, 취약계층에 대한 혐오표현의 문제

소주(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알)

혐오/혐오표현은 때때로 개인적 감정이거나 사적인 이슈인 것처럼 사고될 때가 있다. 마치 혐오/혐오표현을 하는 개인들만 제재하거나 문제삼으면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혐오는 사회 구조적 문제이자 정치적 문제이다. 예를들면,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날(장애인의 날)이 되면 정부가 장애인에 대하여 시혜와 동정을 허용 또는 나서서 조장하지만, 장애인이 권리요구의 주체로서 거리와 광장, 공적인 자리를 점유하는 순간 그들을 ‘불순한’ 존재로 상정하고 혐오하기 시작한다.

평상시에는 성소수자들을 차별하거나 무관심, 외면으로 일관하면서도 감염병 위기시 성소수자들의 협력이 필요하거나 성소수자들을 처벌하려고 할 때에는 그 존재를 소환한다.

이러한 혐오는 사회적으로 취약하고 인권침해 문제가 심각할수록 위험하다. 혐오의 문제는 이미 정치적으로 외면당하고, 주변 환경이 구조적으로 더 위태로운 것과 결부되어 피해자들에게 더 큰 고통이 된다. 


셋째, 취약성과 불평등은 재난 발생의 주요 원인이자 결과라는 점에서 안전권은 인권과 분리될 수 없다. 재난은 위험요인(hazards)과 취약성(vulnerability)이 상호작용한 산물인 위험이 특정 시 공간에서 현실화된 사건이다. “Risk = Hazard × Vulnerability” 공식은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됐다(Birkmann, 2013: 50). (…) 위험요인은 그 자체로 위협적이지만 사회가 취약성을 어떻게 통제, 완화하는 가에 따라 위험의 잠재력과 재난은 매우 다르게 발현된다는 점에서, 결국 안전권을 인권으로 위치시킨다는 것은 취약성과 불평등이라는 렌즈를 통해 첫째, 어떤 사회구조로 누가 더 취약하고 불평등해지는 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둘째, 불평등하고 취약한 조건과 관계에 처한 이들이 자신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에 의미있게 참여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 권한을 보장하는 것이다. 셋째, 이들의 권한 강화로 불평등을 구조화하고 취약성을 강화하는 의도적인 정치적 과정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위험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재난과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이다. – 발제1 사회적 참사로서의 재난과 시민의 안전권 (유해정) 12p
우선 재난 피해자들은 극단적인 취약성에 노출되어 있다. 소중한 생명, 신체, 재산의 상실, 훼손을 포함하는 ‘상실’, 예상 못한 모든 삶과 생활의 비정상화라는 ‘고립’, 수용 곤란한 상실, 책임 주체의 불분명함으로부터 오는 ‘분노’, ‘최선’이라는 거짓말, 피해자의 수단화로부터 유래하는 ‘불신’, 상실의 극복 불가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공포’, 그리고 다양한 상황과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괴로움이라는 ‘고통’ 등이 그 내용이다. 여성, 아동, 장애인, 노인, 외국인 등 재난 아닌 상황에서도 취약한 집단인 이들은 다중적인 취약성에 노출되고, 이동할 수 없어 혹은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극단적으로 심각한 취약성에 노출될 수 있다. 재난의 직접적인 결과인 상실 외의 다른 취약성에 대한 대책, 궁극적으로 상실의 극복을 위한 대책이 필요한 이유이다. – 발제2 재난과 피해자 인권(황필규) 4p

발제1과 발제2에서 모두 재난피해자의 취약성을 언급한다. 우리는 극단적인 취약성을 가지게 되는 재난피해자가 혐오표현에 노출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며 고통을 수반하는지 그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취약성/불평등으로 심화되는 혐오표현의 고통은 특히 재난 이전에도 취약하고 불평등한 구조에 놓여있던 이들에게는 더욱 크게 발생한다. 취약할수록, 불평등한 구조에서 차별받고 권리를 지속적으로 침해당할수록, 혐오표현에 대응할 힘을 구축하기란 쉽지 않다. 

피해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피해자다움’을 강요받는다. “순수한 피해자는 수사와 처벌과정에 참여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나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피해자 스스로 자력구제를 하려 하지 않는다.” “순수한 피해자는 진상규명을 고집하면서 집단적으로 의사를 표시함을 통해 가족친지와 마을사람들을 분열로 몰아넣지 않는다.” “단지 각자 슬픔과 실의에 잠겨 국가의 처분을 기다리되, ‘일반인’의 개입은 마다해야 한다.” 등이 소위 ‘피해자다움’의 예시다. “순수한 피해자는 손해배상 등 돈과 관련된 말을 입에 담지 않으며, 민사소송 등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순수한 피해자는 웃는 경우가 없고 즐거운 표정을 짓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참아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순수한 피해자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등 사실상 피해자로 하여금 권리 주체임을 포기하고 침묵하여야 한다는 ‘피해자다움’의 고정관념은 사회적으로 팽배하다.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정부 및 언론 포함) 인식의 재구성 및 관련 가이드라인의 마련이 절실하다. – 발제2 재난과 피해자 인권(황필규) 5p

게다가 발제2에서 언급되었듯, 피해자들은 ‘피해자다움’, ‘순수함’을 강요받는다. 피해자답지 않거나 순수하지 않은것은 누가 왜 어떻게 판단할까. 혹은 만에 하나 ‘피해자답지’ 않거나 ‘순수하지’ 않다 가정하더라도, 권리를 요구하고 저항하는 것이 왜 비난받아야 하는가.



‘피해자다움’, ‘순수함’의 강요 역시 혐오가 가능한 구조안에서 일어나는 혐오표현으로 본다. 이러한 강요는 권리요구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훼손하며 피해자들을 피동적이기만 한 존재로서 그 힘을 더욱 약화시킨다. 피해자들의 저항을 방해하고 저항할 힘을 빼앗는다. 또한 이러한 강요는 권리요구와 저항의 범위를 국가나 기업이 제한하고 허용하려는 구조를 강화한다. 때문에 이러한 효과는 의도적으로 조장되거나 이용되기도 한다고 본다. 

따라서 혐오표현은 피해자가 안전하게 회복할 권리를 침해한다. 혐오표현은 그 자체로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요소다. 재난상황 발생 후 피해자가 회복할 권리에는 혐오표현에 시달리지 않을 권리도 온전히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재난이 발생했을 때 국가나 기업은 혐오표현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직접 혐오표현을 사용하고 조장한다. 

우리 사회는 재난상황이 아니더라도 일상적으로 사회적으로 취약한 이들에 대한 정치의 혐오표현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단지 혐오적 표현일 뿐 아니라, 정책적으로 수많은 이들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혐오와 차별에 노출된다. 

피해자의 권리, 특히 재난피해자의 권리라는 개념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생소하다. 혐오/혐오표현의 문제를 제대로 짚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회복과 안전할 권리, 그리고 그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저항할 힘이 강해져야 한다. 우리는 혐오/혐오표현에 대하여 그 혐오가 가능하게 하는, 혹은 조장하거나 이용하는 정치와 사회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혐오/혐오표현에 대해 해결방법을 고민해야 할 국가-정부가 오히려 혐오를 자행하거나 방치, 조장하는 것부터 타개해야 한다. 

혐오/혐오표현의 문제는 안전할 권리의 문제다. 이 권리를 말하기 위해 ‘안전’, ‘안전할 권리’를 국가나 기업이 시민들이나 피해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마음대로 정의하고 판단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탈시설을 요구하는 장애인, 슬럿워크(Slut Walk)하는 여성, 산업재해 문제를 지적하는 노동자, 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이야기하는 HIV감염인 등은 물론, 코로나19 팬대믹,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재난상황의 피해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국가가 제대로 귀기울여 듣도록 투쟁해야 한다. 위험을 경험했거나 위험에 노출된 피해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안전대책을 마련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참사란 외상적 사건의 사회적 결과로써, “외상적 재난과 재난 이후 재난 정치의 과정에서 국가 시스템과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과 불신이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제기, 구성되는/된 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는 ‘사회재난=사회적 참사’가 아니며, 사회적 참사가 외상적 사건 자체의 특성일 수도 있지만 또한 사후적으로 구성됨을 보여준다.25) 따라서 사회적 참사로 규정된 사건들은 피해당사자를 넘어 사회구성원들에게 일정한 충격(트라우마)을 야기한다.26) 동시에 문제해결과 사회적 치유를 위한 사회구성원들의 참여와 애도 공동체의 형성을 필요로 한다.– 발제1 사회적 참사로서의 재난과 시민의 안전권 (유해정) 6p

발제1에서 언급되었듯, 피해자들의 회복과 안전할 권리 보장을 위해서는 사회적 연대가 필수적인데, 혐오/혐오표현은 그 연대 및 공동체의 역할을 훼손하거나 방해하기까지 하는 해로운 요소다. 혐오/혐오표현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 피해자에 대해 사회적으로 연대할 기회나 의무, 책임을 끊어낸다. 


혐오/혐오표현은 재난/참사로 인한 죽음에 대한 분명한 명명을 하는 것을 가로막아 소중한 사람을 상실한 이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재난/참사의 원인과 책임을 밝히는 진상규명을 방해한다. 앞서 말한 피해자에 대해 사회적 연대와 애도의 공동체적 실천이 진상규명과 다시 반복하지 않아야 할 미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혐오/혐오표현은 피해자와 그들의 가족에만 미치는 것이 아닌 연쇄적인 영향으로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또한 혐오/혐오표현을 방치, 조장하거나 자행하는 국가가 얼마나 피해자의 회복과 안전한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발제1의 다음과 같은 고민에 공감한다. 연결된 존재, 시민들의 연결된 안전과 권리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지금보다 더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사회적 참사라는 표현과 관련해, 이러한 표현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한 고민이 든다. 사회적 참사라는 표현은, 재난의 참혹한 피해와 충격, 파장을 드러내고,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구성원들의 참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애도 공동체를 통해 시민사회를 복원, 강화하기 위한 시도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국가 시스템의 부재 혹은 총체적 부실로 인한 재난을 왜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가? 참사의 책임을 사회구성원 모두의 책임으로 환원함으로써 정작 책임져야할 이들의 정치적, 법적 책임을 희석시키는 것은 아닌가? 언제까지 시민의 운동, 성금, 자원봉사 등이 재난 수습 및 복구의 핵심 요소가 되어야 하는가? 오히려 책임소재를 기준으로 명명의 프레임을 바꾸는 것이 더욱 적합한 것은 아닐까? 4·16세월호 참사에서 사고를 사건으로, 이태원 압사 사고(incident)를 참사(disaster)로, 사망자를 희생자로 명명하며 정부의 책임 부인, 회피, 축소에 저항해왔듯 말이다. 정확한 명명은 현상의 원인과 성격의 이해, 대책마련 등과 분리되지 않는다. 또한 숨겨진 이면의 진실과 가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명명을 바꾸거나 새 용어나 표현을 만들어 확산하는 일이 세상을 바꾸려 할 때 핵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 발제1 사회적 참사로서의 재난과 시민의 안전권 (유해정) 8p


한편, 감염병 전파상황과 관련하여 정부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문제라는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전달한 바 있다. 코로나19 상황 하에서도 경기도와 서울시에서 아웃팅 우려에 대해 언급하며 차별없이 안전하게 검사를 진행하겠다며 협조해달라는 메시지를 브리핑에서 발표했었다. 이와 같은 메시지들은 일면 필요에 의한 일시적 메시지였다고도 판단되지만 이는 분명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이야기였다.

재난의 유형에 따라 그 모습과 양상이 다르지만, 불평등하게 다가오는/발생하는 재난피해는 취약한 이들에게 더욱 위험하며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보여준다. 이런 조건하에서, 재난상황에까지 혐오/혐오표현이 무차별적으로 난무하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는 국가의 의무와 책임으로서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할 권리가 있다. 

혐오/혐오표현에 대해, 단순히 개개인의 잘못으로 치환하여 책임을 회피하고 권리를 외면하는 국가나 기업, 사회구조에 문제제기 할 수 있는 힘이 더욱 강력해질 때 근본적인 해결책이 명료해질 것이라 본다.

국가가 반차별의 원칙, 인권의 원칙, 안전의 원칙을 중심으로 피해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일때, 혐오/혐오표현을 방치하고 조장하거나 자행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시민들에게 사과할 때, 혐오 대신 연대와 애도의 공동체가 비로소 튼튼히 자리하게 될 것이고 그래야 피해당사자들의 회복과 안전을 위한 권리가 온전히 보장될 것이라 본다.